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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그리고 서울경찰 - 성북경찰서 편

서울경찰 2023. 1. 11. 07:40

성북구는 한양도성 성곽 북쪽에 있어 성북(城北)구라 명명되었습니다.

 

그런데 성저십리* 숭신방과 인창방에 포함될 정도로 한양 중심부에서 가까웠음에도

성북구에 많은 사람이 살기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인 영조(1724~1776)대 부터로,

성북구의 토질 등 제반 환경이 농경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 사대문 주변 10리 이내, 다만 중랑천, 홍제천, 한강 등 자연 경계를 기준으로 한 것으로 보임

 

 

 

 

영조가 성북구의 부흥을 위해 어영청(御營廳)*의 북둔(北屯)을 설치하고 면, 베, 모시 등

포백(曝白)과 훈조(燻造, 메주 쑤는 일) 독점권을 부여한 후 주민이 늘기 시작했는데요.

* 조선 후기 중앙에 설치된 오군영 중 하나로, 왕을 호위하는 군영오군영 - 훈련도감(訓鍊都監), 어영청(御營廳), 금위영(禁衛營), 총융청(摠戎廳), 수어청(守禦廳)

 

시대의 변화에 따라 현대의 성북구는 농경의 부재라는 단점은 상쇄되고

탁월한 도심 접근성이라는 장점은 강화된, 더할 나위 없이 살기 좋은 곳이 되었습니다.

 

서울, 그리고 서울경찰. 그 스물세 번째 이야기!

오늘은 성북구와 성북경찰서를 찾아갑니다.

 

 

 

 

 

성북경찰서는 광복 이후 1945년 10월 21일 국립경찰 창설과 함께 개서,

당시 현재의 성북구, 동대문구, 강북구, 도봉구, 노원구, 중랑구 전체를 관할하던

서울 북동부 경찰서들의 모체경찰서였습니다.

 

이후 1957년 8월 1일 청량리경찰서(現동대문경찰서, 동대문구와 중랑구 관할)와

1969년 6월 12일 북부경찰서(現강북경찰서, 강북구, 도봉구, 노원구 관할)가 신설되어

관할 구역의 조정으로 성북구의 치안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마지막으로 1979년 10월 15일 종암경찰서가 신설되어 성북구 동쪽 관할을 이전,

현재는 성북구 서쪽 치안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현재 성북경찰서의 관할 구역은 성북구 일부로,

33.5개 법정동(성북동, 성북동1가, 정릉동, 삼선동1가, 삼선동2가, 삼선동3가, 삼선동4가, 삼선동5가, 동선동1가, 동선동2가, 동선동3가, 동선동4가, 동선동5가, 돈암동, 동소문동1가, 동소문동2가, 동소문동3가, 동소문동4가, 동소문동5가, 동소문동6가, 동소문동7가, 보문동1가, 보문동2가, 보문동3가, 보문동4가, 보문동5가, 보문동6가, 보문동7가, 안암동1가, 안암동2가, 안암동3가, 안암동4가, 안암동5가, 길음동 일부),

12개 행정동(성북동, 정릉1동, 정릉2동, 정릉3동, 정릉4동, 삼선동, 동선동, 보문동, 안암동, 돈암1동, 돈암2동, 길음1동)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북경찰서는 3개 지구대(돈암, 안암, 길음)와 3개 파출소(정릉, 정릉2, 성북)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주소는 아래 표를 참고해 주세요. ^^

 

 

구분 기관명 주소
경찰서 성북경찰서 서울특별시 성북구 보문로 170
지구대 돈암지구대 서울특별시 성북구 아리랑로5길 54
안암지구대 서울특별시 성북구 지봉로21길 45
길음지구대 서울특별시 성북구 삼양로13길 51
파출소 정릉파출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솔샘로 111
정릉2파출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로26길 6
성북파출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로 94

 

 

 

(좌로부터) 정릉의 정자각, 수복방, 비각

 

 

성북구의 정릉(貞陵, 태조비 신덕고황후*릉)은 경복궁에서 가장 가까운 왕릉으로,

그 직선거리는 4Km가 채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 대한제국 선포 후 신덕고황후로 추존 (이하 생전 지위였던 신덕왕후로 표기)

 

이는 다른 왕릉이 도성 10리 밖에 조성된 것에 비춰 보면 굉장히 이례적인 것으로,

사실 이마저도 최초 왕릉이 있던 위치에 비해서는 더 멀어진 것인데요.

 

정릉이 이렇게 도성과 가까운 곳에 자리 잡은 데에는 조선시대의 정쟁이 얽혀 있습니다.

 

신덕왕후(방번, 방석의 母)는 태조 이성계의 후처이자 조선 최초의 왕비*로,

태조가 신덕왕후를 지극히 여겼기에 차남 방석이 세자로 책봉(1392년)될 수 있었습니다.

* 정부인 신의왕후 한씨(방우, 방과, 방의, 방간, 방원, 방연의 母)는 조선 건국 이전에 사망

 

하지만 신덕왕후가 누린 영화는 길지 않아,

1396년(태조 5년) 41세의 젊은 나이에 급성 신부전증으로 사망했는데요.

 

태조는 왕후와 세자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도성 안인 중구 정동에 능을 조성했고,

훗날 본인이 묻힐 자리도 미리 만들어 두었습니다.

 

 

청계천 광통교 교각의 석물

 

 

그런데 신덕왕후의 사후, 이 모든 것이 변화했습니다.

 

1398년(태조 7년) 이방원이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태조와 이방석을 끌어내렸고,

태조의 차남 이방과를 정종으로 옹립, 본인은 왕세자가 되어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이어서 1400년 태종으로 즉위한 이방원은 종묘에서 위패를 치우고

왕후가 아닌 후궁의 예로 제사를 올리는 등 본격적인 신덕왕후 격하를 시작했는데요.

능 주변 땅도 공신들에게 하사하다가 태조 사후에는 능 자체를 도성 밖으로 옮겼습니다.

 

능을 옮긴 후에도 능침의 병풍석과 난간석을 무너진 청계천 광통교의 복구에 사용하고,

정자각의 목재와 석재로 태평관을 짓는데 사용하는 등 오랜 기간 수모를 겪었답니다.

 

이후 260여 년간 관리를 받지 못했던 정릉이 복권된 것은 1669년(현종 10년)입니다.

 

신하들의 복권과 관련된 연이은 상소를 현종이 받아들이며,

신덕왕후의 위패가 다시 종묘에 모셔지고 왕릉도 수복될 수 있었답니다.

 

 

 

 

 

이 세상 만물에 특별하지 않은 것이 어디 있겠냐마는,

성북구의 길상사(吉祥寺)는 정말 특별한 탄생 배경을 지니고 있는데요.

 

길상사는 삼청각(三淸閣), 청운각(淸雲閣)과 함께 '북한산 3각'이라 불리던 대형 요정

대원각(大苑閣)을 기반으로 창건된 현대적인 도심 속의 사찰입니다.

 

그 배경에는 법명 길상화(吉祥華)로 더 유명한 대원각의 주인 김영한 씨가 있습니다.

 

길상사는 법정 스님의 '무소유'을 읽고 감명을 받은 김영한 씨가 1995년 법정 스님에게

7천여 평 대지와 건물 등 당시 가치로 1천억 원이 넘는 재산을 시주해 창건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길상사의 건물들 역시 대원각 당시의 것을 개 · 보수해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

여타 전통사찰을 방문할 때와는 사뭇 다르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는데,

그래서인지 길상사에는 종교적 목적 외에도 방문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습니다.

 

김영한 씨는 1999년 별세했고, 유언에 따라 유골이 길상사 곳곳에 뿌려졌는데요.

길상사 경내엔 공덕비가 세워져 그녀를 기리고 있습니다.

 

 

 

 

이어서 소개해드릴 또 하나의 특별한 사찰은 성북구 보문동의 보문사(普門寺)입니다.

 

보문사는 1115년(고려 예종 10년) 담진(曇眞)이 비구니 수련장으로 창건한 사찰로,

조선시대에 와서는 탑골승방*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는데,

이는 청룡사, 미타사 등 비구니 도량이 군집해 있어 붙여진 것이라 합니다.

* 옥수동 두뭇개승방, 석관동 돌곶이승방, 숭인동 새절승방과 함께 비구니 스님들이 거처하는성 밖 네 니사(尼寺) 중 하나, 보문동 인근 비구니 승이 머누는 암자를 통칭하기도 함

 

이처럼 보문사는 예로부터 비구니스님들이 상주하는 비구니 사찰로 전해오는데요.

 

지난 1972년엔 보문사를 총본산으로 하여 우리나라 유일의 비구니 종단

대한불교보문종(大韓佛敎普門宗)이 창종*되어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 1962년 대한불교조계종 통합종단 출범을 두고 비구승단과 대처승단이 대립이 격화되어비구니 수행환경 수호와 여성의 권익 ·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 창종

 

보문사 경내에 들어서면 보문종 창종 이후 경주 석굴암을 본떠 제작된 석굴암(1972)과

평창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을 재현한 묘보탑(1979)이 방문자를 반기는데요.

 

이 또한 당장은 아니지만, 먼 훗날 후손들에게는 의미 있는 문화재가 될 것 같습니다.

 

 

 

 

 

간송미술관에서 성북로23길을 따라 한양도성이 보이는 방향으로 비탈길을 오르면

시인 김광섭의 작품 '성북동 비둘기(1966作)'의 배경, 북정마을*에 도달합니다.

* 포백 · 훈조 인부들의 북적북적 거리는 소리 또는 메주 쑬 때 끓는 소리에서 왔다고 전해짐

 

북정마을에 있는 500여 채의 주택은 대부분 1960~70년대 건축된 것으로,

한양도성으로 인한 개발 제한 때문에 근현대 주택과 골목길의 원형이 잘 남아있는데요.

 

북정마을의 골목길은 일반적인 산책로를 걷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주택 사이의 좁은 골목길은 굽이굽이 이어지다 갑자기 막다른 길이 되기도 하는 등

갈림길을 지날 때마다 바로 다음에 나타날 광경이 도무지 예측되지 않습니다.

 

북정마을엔 언제부턴가 젊은 예술인들이 작업실을 만드는 등 하나둘 모여들고 있는데요.

고즈넉한 마을 분위기에 더해 천변만화하는 골목길이 영감을 제공하기 때문인 듯합니다.

 

 

 

 

북정마을 최고의 명소는 만해 한용운*의 거처 심우장(尋牛莊, 사적 제550호)입니다.

* 본명은 한정옥(韓貞玉), 용운(龍雲)은 법명, 만해(萬海 혹은 卍海)는 아호일제강점기의 시인 · 승려 · 독립운동가이자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1인

 

심우장은 1933년 지어져 한용운 선생이 1944년 입적할 때까지 만년을 지낸 곳으로,

3.1운동 참여 후 3년의 옥고를 치르고 풀려난 그가 셋방에서 어렵게 생활하는 것을 본

승려 벽산(碧山) 등 지인의 도움으로 매입한 땅 위에 한용운 선생이 손수 축조했습니다.

 

심우(尋牛)는 선종에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데 빗대

설명한 열 가지 수행 단계에서 온 것으로, 소(牛)는 인간의 본성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심우장의 한용운 선생이 사용하던 방에는 친필 문서, 연구 논문집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관람 시간 내에는 자유롭게 들어가 그가 바라본 성북동의 정취를 느껴볼 수 있는데요.

 

고요한 북정마을에서 소리 없이 기왓장에 내려앉은 눈마저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떠난 그의 넋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성북경찰서의 성북파출소는 경찰관 31명이 근무하는 지역관서입니다.

내부 사정을 모른 채 보면 그냥 평범한 파출소일 뿐인데요.

 

성북파출소의 관할 지역은 다른 지역관서와 차별화된 특성이 있는데,

바로 대사관저 밀집 지역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북악산 자락엔 미국, 독일, 일본 등 총 41개국의 대사관, 대사관저 및 부대사관저와

외교관 거주를 위한 타운하우스 등 외교공관 및 관련 시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습니다.

 

외교공관은 외교관을 파견한 해당 국가를 대표하는 시설이기에 테러 등 우발적인 사태의

표적이 될 수 있기에 주재국에서는 공관 시설의 안전 보장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요.

 

성북경찰서는 경비과와 성북파출소가 그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그중 성북파출소는 대사관저 순찰에 차량 1대를 상시 배치해 대응하고 있습니다.

 

경찰의 모든 업무가 마찬가지지만, 어떤 문제도 발생하지 않게 방비하고 대비하는 것은

이미 발생한 문제를 처리하는 것보다 훨씬 고단하고도 지난한 과제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의 대외적인 국가 신인도와 직결될 수 있는 외교공관 치안 업무를

빈틈없이 묵묵하게 수행하고 있는 성북파출소는 유능한 경찰관들의 집합소랍니다.

 

 

보토현 옆 인디언바위 위에서 본 성북구의 일출

 

 

보토현 옆 인디언바위 위에서 본 성북구의 일출

 

보토현(補土峴)은 북한산과 북악산을 잇는 산줄기의 고개로,

북악터널이 만들어지기 전 평창동과 정릉동을 오가기 위해 넘던 곳입니다.

 

그런데 풍수지리를 중하게 여기던 조선시대에는 이 위치가 산의 정기가 뻗어 나가는데

병목지점이 된다는 판단에 주기적으로 흙을 보충(補土)*해 기운을 이어줬다고 하는데요.

* 오군영 중 하나인 총융청(摠戎廳)에 보토소(補土所)를 설치해 해당 업무를 관장케 함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괜히 언덕을 높여 불편만 초래한 미신으로 치부될 수도 있지만,

언덕을 메우는 행위가 아닌 본질을 보자면 일상적인 구복(求福) 행위와 다르지 않지요.

 

비록 새해 첫 일출을 담아내지는 못했지만,

예로부터 수많은 사람이 염원을 쌓아왔던 보토현에서 독자 여러분께 인사 올립니다.

 

"2023년 계묘년 새해, 모두 원하는 바를 이루는 한 해가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