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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그리고 서울경찰 - 금천경찰서 편

서울경찰 2022. 12. 28. 07:20

금천구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고구려의 한강 유역 점령 이후로,

고구려는 당시 금천구 일대를 잉벌노현(仍伐奴縣)이라 불렀습니다.

 

잉벌노는 '뻗어 나가는 땅'을 의미하는 순우리말 '늠내'의 음차(音借)*로 알려지는데요.

* 한자의 음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

 

통일신라 경덕왕 때 곡양현(穀壤縣), 조선 태종 때 금천현(衿川縣)으로 개칭되었고,

조선 후기에 시흥현(始興縣)이 되며 현재의 금천구 시흥동에 흔적을 남겼습니다.

 

 

 

이런 오랜 역사와는 별개로 금천구는 광진구, 강북구와 함께

1995년 3월 신설된(구로구에서 분리 · 신설) 서울의 막내뻘이 되는 자치구인데요.

 

옛 지명에 담긴 뜻이 마치 예언과도 같이 적중하며

지식 · 정보통신산업을 기반으로 세계를 향해 '뻗어나가는 땅'이 되었답니다.

 

서울, 그리고 서울경찰. 그 스물두 번째 이야기!

오늘은 금천구와 금천경찰서를 찾아갑니다.

 

 

 

 

 

금천경찰서는 1972년 12월 5일 노량진경찰서(現동작경찰서)와 영등포경찰서에서

파출소를 인수하며 구로구 구로동 231번지의 임시청사에서 개서했습니다.

 

개서 당시 관서 명칭은 남부경찰서로,

현재의 금천구 전체와 구로구, 관악구의 일부에 해당하는 넓은 지역을 관할했습니다.

 

이후 1976년 12월 20일 관악경찰서, 이어서 1980년 11월 3일 구로경찰서가 개서하며

경찰서간 관할이 조정되었고, 2006년 3월 1일 금천경찰서로 개칭했습니다.

 

금천경찰서는 서울의 다른 경찰서와 다르게 2006년 3월 1일 관할 조정 이후로도

2019년 1월까지 관악구 조원동(舊신림8동)의 치안을 같이 책임졌는데요.

 

이는 남부경찰서 당시 지어진 신청사의 위치가 조원동이었기 때문으로,

시흥동에 신청사가 건립되며 최종적으로 관악경찰서와 관할 조정이 이루어졌습니다.

 

현재 금천경찰서의 관할 구역은 금천구 전체로,

3개 법정동(가산동, 독산동, 시흥동),

10개 행정동(가산동, 독산1동, 독산2동, 독산3동, 독산4동, 시흥1동, 시흥2동, 시흥3동, 시흥4동, 시흥5동)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금천경찰서는 2개 지구대(문성, 백산)와 3개 파출소(금천, 독산, 가산)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주소는 아래 표를 참고해 주세요. ^^

 

 

구분 기관명 주소
경찰서 금천경찰서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대로73길 50
지구대 문성지구대 서울특별시 금천구 독산로76길 20
백산지구대 서울특별시 금천구 탑골로2길 37
파출소 금천파출소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대로57길 45
독산파출소 서울특별시 금천구 벚꽃로10길 89
가산파출소 서울특별시 금천구 벚꽃로56길 174

 

 

 

구로공단 노동자생활체험관(금천 순이의 집)의 쪽방(봉제방)

 

 

구로구에 '구로 디지털단지'가 있듯이, 금천구엔 '가산 디지털단지'가 있습니다.

 

이전에도 소개했듯이(링크) 두 단지는 1967년 조성된 구로공단에 근원을 두고 있는데,

1960~70년대 봉제 · 섬유 · 전기 등 경공업을 중심으로 수출 산업을 주도했습니다.

 

1995년 남부순환로를 경계로 구로구와 금천구가 분리되며 구로공단도 나뉘었고,

2000년엔 현재의 명칭인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변경되었습니다.

 

이러한 서울디지털산업단지의 형성 배경을 알고 나면 '구로공단 노동자생활체험관'이

금천구에 있는 것 역시 조금도 이상해 보이지 않지요.

 

 

 

 

가산 디지털단지의 정식 명칭은 '서울디지털산업단지 2 · 3단지'로,

2단지는 의류 · 모피 등 패션디자인 산업 관련 업체가 주를 이루고,

3단지는 지식 · 정보통신산업 관련 업체가 대거 포진해 있습니다.

 

경공업 중심의 업체로 빼곡하게 들어찬 구로공단에서 디지털산업단지로 변화한 것은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발전한 것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지만,

실상 그때나 지금이나 국가 핵심산업의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은 동일하답니다.

 

 

 

 

가산 디지털단지의 아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분주합니다.

 

7호선 최대 이용객을 자랑하는 가산디지털단지역을 중심으로

사거리 건널목마다 직장인들이 구름같이 모였다 각자의 회사로 흩어집니다.

 

특히 전철역 인근의 빌딩은 지하 공간이 서로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어,

직장인들이 슬리퍼를 신은 채 지하 식당가로 이동하는 모습도 쉽게 볼 수 있는데요.

 

바쁘게 움직이는 인파 속에서 잠시간 IT 업종 종사자가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답니다.

 

 

 

(좌측부터) 범종각, 8각 9층 석탑, 삼성각

 

 

호압사(虎壓寺)는 1393년(태조 2년) 무학대사가 창건한 금천구의 유일한 전통 사찰로

창건과 관련된 두 가지 재미있는 전설이 알려져 있는데요.

 

그중 하나는 범바위(虎巖) 설로,

금천 동쪽 산의 형세가 범이 걸어가는 듯하고 험하고 위태한 바위(虎巖)가 있어

바위 북쪽에 호갑(虎岬)이란 절을 세워 산세를 누르려 했다는 것이고,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10권 경기 금천현

 

다른 하나는 궁궐과 관련된 설로,

새 도읍지 한양에 궁궐을 짓는데 괴물이 밤마다 나타나 여러 차례 궁궐을 무너트리기에

태조가 무학대사의 조언을 받아 호랑이 꼬리에 해당하는 현재의 위치에 사찰을 지어

한양의 지세를 안정시켰다는 것입니다.

 

두 전설 중 어느 쪽이 맞는지 둘 모두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창건 시기로 미뤄보면 조선의 한양 천도와 관련이 있을 법도 합니다.

 

 

 

 

호압사 뒤편으로 돌아가면 그 전설 속의 호랑이, 호암산(393m)을 오를 수 있습니다.

 

정산 인근의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계단이 촘촘히 놓여 있어 부담 없이 오를 수 있고

산이 높지 않은 덕에 시선이 트이는 조망 지점에 닿기까지도 큰 힘이 들지 않습니다.

 

호암산에 오르면 금천구 일대를 시원하게 둘러볼 수 있는데요.

 

산을 좋아하는 분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삼성산(481m), 관악산(632m)까지 이어지는 연계 산행을 즐긴다고 합니다.

 

 

 

 

정상에서 석수역 쪽으로 방향을 틀어 완만한 능선을 따라가다

석구상과 호암산성지를 지나면 갑자기 큰 연못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한우물'입니다.

 

한우물은 '큰' 우물이란 뜻으로, 통일신라 문무왕 시대에 당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해

축조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후 임진왜란 때에도 군용수로 사용했다고 전해집니다.

 

한우물은 지금도 연못으로 기능하는 제1우물지와 터만 남은 제2우물지가 있는데요.

 

제2우물지에서는 잉벌내력지내미(仍伐內力只內未)*라 적힌 청동 숟가락이 출토되어

통일신라 경덕왕(742~765년) 이전에 만들어진 유적임을 지지하는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 혹은 仍伐內力只乃末(잉벌내역지내말)로 보아, 신라 17관등 명칭 가운데 11위인 내말(=나마)을 지낸 잉벌내(=노)의 역지라는 인물이 사용한 것이란 견해도 있음

 

 

 

금천현(시흥현) 동현관아 터와 은행나무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 전기까지의 흔적이 역력한 호암산을 내려와 시흥동에 이르면

조선시대 후기에 성대히 치러진 축제의 주무대에 도달합니다.

 

시흥동은 정조가 화성의 현륭원(顯隆園)*에 행차할 때 유숙한 시흥행궁이 있던 곳으로,

880여 년 수령의 은행나무 세 그루가 있는 은행나무 시장 인근 유력한 후보지입니다.

*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무덤,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 사도세자가 장조(莊祖)로 추존되며 융릉(隆陵)으로 격상

 

정조는 24년의 재위 기간 중 총 66차례의 행행(幸行, 궁궐 밖 나들이)을 했는데

그중 13차례가 현륭원 행차일 정도로 효를 직접 실천하고자 하는 임금이었는데요.

 

정조의 행차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수원화성 건설 후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행한 '을묘원행(1795년)'으로, 원행을묘정리의궤*가 당시의 모습을 생생히 전달하고 있습니다.

* 의궤 : 의식과 궤범, 후대에 유사한 의식을 시행할 때 시행착오를 방지하라는 취지로 중요한 의식에 대해 관련된 기록과 현장의 모습을 담은 그림을 함께 모아 간행한 책

 

 

시흥행궁전시관의 시흥행궁 모형

 

 

정조는 을묘원행 시 배다리로 한강을 건너 노량행궁(용양봉저정)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시흥행궁에 이르러서 하룻밤을 묵은 후 수원화성으로 향했는데요.

 

왕족, 정승, 판서에 궁녀와 호위 군사들까지 6천여 명에 가까운 인원이 움직인 데다

그 행렬을 백성들이 자유롭게 구경할 수 있게 하고 주변에 임시로 좌판이 벌어지는 등

축제 분위기가 펼쳐졌다니, 정조의 말대로 "실로 천년 만에 처음 있는 경사"였습니다.

 

 

 

 

남태령을 넘어가는 기존의 길은 어머니를 모시기 적합지 않다고 판단한 정조는

을묘원행을 위해 기존에 없던 새로운 길, 현재의 시흥대로를 개척하기도 했는데요.

 

이렇게 만들어진 시흥대로는 현재에까지 이어져 1번 국도와 경부선 등

서울에서 남쪽을 향해 뻗어나가는 중요한 교통로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또한 정조는 행행을 민심을 듣고 화답하기 위한 수단으로도 활용했습니다.

 

정조는 상언(문서로 올림), 격쟁(말로 사연을 고함)을 통해 백성과 직접 소통했는데요.

13회의 현륭원 참배 동안에 처리한 상언만 해도 1천여 건 이상이었다고 합니다.

 

현대의 민주주의 국가에서와 같은 수준의 소통은 아니겠지만

당시로서는 굉장히 혁신적인 임금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코로나19로 중단되었던 정조의 능행차 재현 행사가 올해부터 다시 재개되었다고도 하니,

잘 계승하고 발전시켜 후대에 전달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금천경찰서 강력팀은 영화 '범죄도시' 1편에 모티브를 제공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특히 컨테이너 사무실에서 고군분투하는 형사들의 모습이 강렬한 인상을 심어줬는데,

강력팀의 컨테이너 생활은 2018년 12월 신청사로 옮길 때까지 이어졌다고 합니다.

 

현재에도 강력팀에는 컨테이너 시절부터 경험을 쌓아 온 베테랑 형사도 다수 있는데요.

당연하지만 미디어를 통해 그려지는 모습과는 다르게 부드러운 인상을 지니고 있답니다.

 

형사과의 형사팀과 강력팀, 사실 명칭만으로는 업무 영역을 알아차리기 힘든데요.

 

간단히 보자면 형사팀은 주거지 등이 명확해 추적 없이 검거 가능한 사건이 대부분이고,

강력팀의 사건은 피의자 불상의 사건이 많아 추적이 필요하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강력팀이 맡는 사건은 살인, 강도, 절도, 폭력, 마약 등 말 그대로 '강력범죄'로,

현장에서 흥분한 피의자를 검거하며 위험한 상황에 부딪힐 때도 많다고 합니다.

 

게다가 신고를 받으면 검거까지 즉시성을 요구하는 사건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잡을 때까지 집에 들어가지 않는다."라는 각오로 출동한다는데요.

 

금천경찰서의 경우 긴급 신고에 대해 강력팀이 현장에서 초동조치를 하고 있어,

이와 관련된 현장 출동도 적지 않습니다. (강력 5개 팀이 월간 180여 건 처리)

 

다행히도 최근 CCTV를 비롯한 각종 기술 발전으로 우발적인 범죄 외의 강력범죄는

줄어드는 추세라지만, 무인 점포 털이범과 같은 단순 절도는 여전히 기승이랍니다.

 

이러한 '잡범'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심지어 피해 액수 수천 원의 절도 범죄에도

강력팀 형사들은 끝까지 추적해 검거하고야 마는데요.

 

작은 범죄도 방치할 경우 심각한 치안 위해 요소가 될 개연성이 있기 때문이랍니다.

 

누구나 평온한 일상을 영위할 수 있도록 지역 주민의 곁에서, 그리고 치안의 최일선에서

각종 범죄와 싸워나가는 강력팀 형사들의 뒷모습이 듬직해 보입니다.

 

 

 

 

경기도 의왕시와 수원시의 경계인 광교산에서 발원해 한강으로 합류하는 안양천은

사시사철 언제나 곁을 지키고 있는 동네 친구와도 같이 평온하고 친근한 모습입니다.

 

옷차림 외에는 계절의 변화를 실감하기 힘든 인근 디지털단지의 빌딩 숲과는 다르게

안양천은 시시각각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으며 시간의 흐름을 역동적으로 보여줍니다.

 

특히 봄이 오면 제방을 따라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벚꽃이 장관을 이루는데요.

 

필자는 옷깃을 여미게 하는 겨울의 복판에서 눈으로는 앙상한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마음은 푸른 옷을 갈아입은 안양천에 포근하게 내리는 벚꽃잎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또다시 저물어가는 한 해와 이별을 준비하며,

못다 한 아쉬움보다 새로이 펼쳐질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더 커지는 하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