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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경찰이야기/현장영웅 소개

우리 동네 경찰서 - 동작경찰서

서울경찰 2015. 6. 29. 09:16

 

  「우리동네 경찰서」(이하 우리서)가 한 호 쉬었습니다.

  매호 우측 상단에 붙박이처럼 있던 '우리서'가 보이지 않자,

  수많은 독자들의 서울경찰청을 항의(?) 방문하고,

  이메일과 댓글을 통해 '다시 기사를 올려라!'는

  열화와 같은 요구가 있을 줄 알았으나... ....

 

  현실은,

  아무도 그런 기사가 있었던 줄도 모르고

  심지어 '우리서'가 없었던 지난 호가 유독 더 재미있었다는 의견도.... ㅠㅠ

 

  이러다 하반기 인사 때 홍보실에 쫓겨날 수도 있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다시금 경찰서를 방문합니다. ^^

  (여러분의 댓글이 기사를 쓰는 사람에게는 큰 힘이 됩니다!)

 

  각설하고,

  오늘 방문할 '우리서'는 「동작 경찰서」입니다.

 

 

  '동작 경찰서'는 '노량진 경찰서'라는 이름으로 1966년에 개서했습니다.

  서울 도심 사대문 안의 경찰서가 1945년 경찰 창설과 함께 개서했던 것과는 비교되지요.

  서울에 있는 경찰서의 개서 년도를 살펴보면,

  서울의 행정구역이 근대화를 거치면서 어떻게 확장됐는지를 잘 알 수 있는데요.

 

  동작 경찰서가 있던 이곳은 조선 시대에는 경기도 과천군 상북면 동작리였습니다.

  이후, 1914년 경기도 시흥군 북면에 속하였고,

  1949년 8월에는 서울이 커지면서 서울 영등포구로 편입하게 되었다가

  1973년 관악구로, 1980년 비로소 지금의 동작구로 자리 잡았습니다.

  2006년 이곳 경찰서도 '노량진 경찰서'에서 '동작 경찰서'로 개명했습니다.

 

  한강 이남에 있는 동작구는 예로부터 나루터가 발달했는데요.

  지명에 '진(津)'이 들어가 곳은 나루터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서울의 광진(廣津), 송파진(松坡津), 양화진(楊花津),

  노량진(鷺梁津), 동작진(銅雀津)이 바로 한강의 대표 나루터입니다.

 

 

  이곳은 동작대교 아래 '동재기 나루터'가 있었던 곳입니다.

  노량진에서 오면 흑석동 고개를 넘어와 만날 수 있는 곳인데요.

 

  주변에 검은 돌이 많아 '흑석동'이라고 불리던 곳을 지나면

  '동(銅)' 색깔을 띤 구릿빛 돌이 많았기에 사람들은 이곳을 동재기 나루터라고 불렀고,

  지금의 '동작'이라는 말의 어원이 됐습니다.

 

  동재기 나루터는 서울에서 과천 · 수원 · 평택을 거쳐 지방으로 내려가거나

  서울로 들어오던 사람들이 배를 타고 건너던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호국보훈의 달인 6월에 '우리서' 동작 경찰서를 선정한 가장 큰 이유.

  바로 16만여 명의 호국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국립서울현충원'(이하 현충원)이 위치하고 있어서입니다.

 

 

  현충원은 1955년 7월 15일 이곳 동작동에 142만㎡(43만여 평)의 대지에 설립되었습니다.

  민족적 수난인 한국전쟁으로 전몰한 국군 장병들이 이름없는 넋이 되어 전국에 산재해 있던 것을

  한 곳에 안장하기 위하여 '국군묘지'라는 이름으로 설치되었습니다.

 

  처음 국군묘지의 안치 대상은 전몰한 군인에 한하였으나,

  1965년 '국립묘지'로 그 격을 높이고,

  안장 대상자 범위도 군인, 경찰 외에 국가에 공을 세운 민간인에까지 확대하였습니다.

  그리고 1996년 6월 1일 '국립묘지'에서 '국립현충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였습니다.

 

  이곳을 좀 더 둘러볼까요?

 

 

  채명신 장군의 묘역입니다.

  1926년 황해도 곡산에서 항일운동가의 아들로 태어난 채 장군은

  1947년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5기로 입학해, 한국 전쟁에는 소위로 참전했습니다.

 

  1965년 베트남 전쟁에는 맹호 부대장으로 4년 동안 참전했는데요.

  당시 "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더라도 1명의 양민을 보호하라"고 지시하는 등

  덕장으로 존경을 받았던 분입니다.

 

  지난 2013년 고인이 된 채 장군은 '나를 파월 장병 곁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이곳 현충원 장군 묘역이 아닌 일반 병사 묘역에 안장됐습니다.

 

  죽어서도 전쟁 동료들 속에 있는 채명신 장군의 비석을 보는 것만으로도

  덕장의 기운을 느낄 수 있습니다.

 

 

  경찰충혼탑입니다.

  우연히 저희가 방문한 날. 경감급 기본 교육생들이 현충원 방문을 하고 있었는데요.

  국가와 국민을 위해 몸 바친 선배경찰관들의 묘역에 머리 숙이는 후배들의 모습에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제가 아는 이름도 있네요.

  2013년 신호위반을 하던 오토바이에 치여 순직한 박경균 경감의 묘역입니다.

  한 시대를 한 하늘 아래서 함께 근무한 동료 경찰의 비석 앞에 선다는 것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현충원을 나와 사육신 공원으로 향합니다.

 

  사육신에 대해서 아시나요?

  세조 2년(1456)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처형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성삼문 · 박팽년 · 하위지 · 이개 · 유성원 · 유응부 등 여섯 분을 가리킵니다.

 

 

  1681년 사육신이 처형당하고 200여 년이 지나서 숙종이 이곳에 서원을 세워 이들의 충절을 기원했으며,

  이후 정조(1782)가 이곳에 신도비를 세워 이들을 추모했다고 합니다.

 

  1978년 서울시는 이곳 묘역을 9,370평으로 확장하고

  의절사, 불이문, 홍살문, 비각을 새로 지어 충효 사상의 실천도장으로 정화하고자 했습니다.

 

  본래 이 묘역에는 박팽년, 성삼문, 유응부, 이개의 묘만 있었으나

  그 후 하위지, 류성원, 김문기의 허묘(墟墓)도 함께 추봉하였습니다.

 

 

  불이문입니다.

  '忠臣不事二君(충신불사이군)'

  '충성된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라는 고사에서 따온 모양입니다.

 

  이처럼 동작구에는 곳곳에 나라에 대한 충(忠)과 관련된 흔적들이 많습니다.

 

 

  이번에는 효(孝)에 대한 흔적들을 찾아볼까요?

 

  '화성능행도'는 정조가 1795년 2월 9일부터 16일까지 8일간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소 현륭원(顯隆園)에 행차한 뒤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던 일을 그린 것인데요,

  이후 정조는 자주 수원을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효성이 지극했던 정조의 흔적을 이곳 동작구 곳곳에서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장승배기'라고 들어보셨죠?

 

  지하철 7호선 장승배기역에 있는 장승들인데요.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참배 길을 떠난 정조는 지금의 이 자리에서 항상 쉬었답니다.

  지금은 차량이 다니고 도심 번화가이지만, 옛날에 이 일대는 인가가 없는 울창한 나무숲이었답니다.

 

  어두운 저녁이면 오싹한 기운까지 돌자 정조는 "이곳에 장승을 만들어 세워라. 하나는 장사 모양을 한 남자 장승을 세워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또 하나는 여자 장승을 세워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으로 하여라."하고 명했답니다.

 

  이때부터 이곳은 장승배기란 지명이 붙게 되었고

  정조는 아버지의 묘소를 찾아가는 길에 이 장승 앞에 어가를 멈추고 편안하게 쉬었다고 하네요. ^^

 

 

  한강대교가 보이는 이곳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도 정조(15년, 1791)가 지은 행궁입니다.

 

  이곳 행궁은 지금의 휴게소 같은 곳입니다.

  한강에 다리가 없던 시절 왕의 행차가 다리를 건너기 위해서는 배다리를 설치했는데요.

  다리가 설치되는 동안 왕 일행이 쉬었던 곳입니다.

 

  용양봉저정에서 한강대교가 바로 보이는 것으로 보아

  왕 일행이 한강대교가 놓인 곳을 통해 강을 건너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동작경찰서 관내에는 의미 있는 다리들이 몇 개 있는데요.

  용양봉저정에서 바로 보이는 이곳 '한강대교'는 1900년 한강을 남북으로 잇는 최초의 다리입니다.

  한국전쟁 때 파괴되었다가 1969년 다시 복구된 역사가 있는 다리입니다.

 

 

  한강대교 옆 동작대교는 우리나라 최초의 지하철과 차량이 함께 다닐 수 있는 병용다리입니다.

 

 

  노량진역입니다.

  이곳 노량진역에는 철도의 시발지를 알리는 돌비석이 있는데요.

  일반인은 들어갈 수 없는 철길 중간에 있어 노량진 역의 협조로 사진을 찍을 수 있었습니다.

 

 

  1897년 3월 22일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철도가 착공되었습니다.

  최초 건설을 했던 미국인 제임스 모스는 공사자금이 부족하자 이를 일본인 회사에 팔아넘겼고,

  1899년 4월 일본에 의한 두 번째 기공식이 열렸으며,

  우여곡절 끝에 1899년 9월 18일 노량진역에서 인천역 간 33.2Km의 철도가 놓임으로써

  우리나라 철도의 역사가 시작됐다고 합니다.

 

 

  노량진에는 수산시장과 학원가가 있는데요.

  노량진 학원가를 설명한 글은 서울경찰 뉴스레터 41호에 있으니 참고해 보세요. ^^

 

  노량진역 건너편 동작경찰서에 도착했습니다.

 

 

  노량진 경찰서 민원실에는 올해 12월 정년퇴직을 앞둔 인상 좋은 경찰관이 있다고 해서 찾아갔습니다.

 

  바로 교통관리계장 김우찬 경위입니다.

  올해로 경찰근무 33년째인 김우찬 경우는 교통업무의 달인인데요.

  정년을 6개월 앞둔 지금도, 유치원 · 초 · 중 · 고등학교는 물론

  경로당까지 찾아가 교통안전교육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Q. 유치원부터 경로당의 어르신까지 교통안전교육을 하는데 강의에 대한 본인만의 비법이 있나요?

 

  A. 있지요, 세대별로 사용하는 언어가 다릅니다. 천편일률적인 강의를 한다면 아무도 공감을 안 합니다.

 

 

  김 경위는 성공적인 강의를 위해 마술을 배우기도 하고,

  최신 유머와 교육 관련된 동영상 자료도 평소에 수집하는 것이 취미라고 합니다.

 

  이렇게 열심히 준비하는 이유는 학원가가 밀집한 동작경찰서와 고시생들로 북적이는 관악경찰서에서 30년을 근무했기 때문에 배우고자 하는 수험생의 열정과 심리를 잘 알기 때문이랍니다.

 

 

  "네가 조급해하거나 서두르지 않는다면 아주 좋은 행운이 온다."

 

  방범순찰대 의경들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는 정광영 경사는 독특한 취미가 있는 경찰관인데요.

  바로 손금과 타로를 연구하고 있는 경찰관입니다.

 

 

  동작경찰서 수사지원팀에 근무하고 있는 정광영 경사는

  10년 전 불확실한 자신의 미래가 궁금해 손금과 타로를 공부하게 됐지만,

  행운이란 것은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 찾아오기보다는

  노력하는 자가 만날 확률이 높은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요즘은 점심시간이나 일과시간이 끝난 후 찾아오는 동료나 의경들에게 상담해 주고 있답니다.

 

  정 경사의 꿈은 경찰청 과학수사과에서 범죄자들의 유형별 손금에 관한 연구를 해 보는 것이라고 하는데요.

  지문뿐 아니라 손금도 수사기법으로 활용하는 외국 사례가 있는 만큼,

  프로파일링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가기를 기대해 봅니다.

 

 

  포춘 폴리스 정광영 경사의 말이

  지문의 경우 "만인부동(萬人不同), 종생불변(終生不變)"하지만

  종생불변한 운명은 없다고 합니다.

 

  자신의 노력이 자신의 운명도 바꿀 수 있다고 하니,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기회가 올 때 더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

  가장 좋은 운명을 가진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

 

  손금이나 지문이 한 사람의 살아온 인생의 발자취라면

  지금 이 시간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일하는 서울경찰의 노력이야말로

  서울시민의 행복이고 안전을 위한 지름길이라는 생각에 어깨가 무거워집니다.

 

  "서울경찰 파이팅!"

 

  다음 방문할 우리서는

  '마포 경찰서'입니다.

 

 

 

취재 : 홍보담당관실 이주일 경위

촬영 : 홍보담당관실 박세원 경사